설탕(雪糖). 한자 그대로 풀면 ‘눈처럼 흰 사탕’이다. 원래 한자 문화권에서 사탕은 사탕수수즙을 졸여 만든 갈색 덩어리, 즉 사당(沙糖ㆍ모래설탕)을 가리켰다. 인도의 결정화 기술이 중국으로 전해지며 더 희고 고운 결정이 만들어졌고 설탕이 됐다. 어원을 거슬러 오르면 산스크리트어 ‘샤르카라(?arkar?, 자갈ㆍ모래알)’가 나온다. 인도에서 아랍으로, 아랍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극동까지. 밀이 ‘빵’이라는 단어에 자신의 여정을 새겼듯, 사탕수수는 ‘설탕’이라는 이름 자체에 자신이 걸어온 무역로를 새겨 넣었다.
설탕은 사탕수수와 사탕무 외에도 옥수수(포도당ㆍ과당), 단풍나무 수액, 스테비아 같은 다양한 탄수화물원에서 얻을 수 있다. 옥수수 이야기는 지난 회에서 다뤘다. 이번 회는 세계 설탕 생산의 근간을 이루는 두 작물, 사탕수수와 사탕무로 범위를 좁힌다.
◆8000년의 여정, 그리고 무거운 그림자 하나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뉴기니섬이다. 기원전 8000년 무렵 원주민들이 야생 사탕수수를 씹어 단맛을 즐긴 것이 재배의 시작으로 추정된다. 인도를 거쳐 결정화 기술이 발달했고,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따라 지중해까지 퍼졌으며,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유럽 귀족의 사치품이 됐다. 1493년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에 사탕수수를 심으면서 신대륙 플랜테이션 시대가 열렸다. 이 노동집약적 산업은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가장 큰 수요처가 됐다. 설탕이 왕실의 사치품에서 서민의 식탁으로 내려온 이면에는 인류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착취의 역사가 있었다.
사탕수수와 사탕무, 같은 단맛 다른 몸
사탕수수는 C4 광합성을 하는 열대성 여러해살이 벼과 식물이다. 태양 에너지를 바이오매스로 전환하는 효율이 식물 중 최상급이어서, 1㎡당 15kg 이상의 수확이 가능하다. 재배는 씨앗이 아니라 줄기로 시작한다. 눈(bud)이 2~3개 들어가도록 30~40㎝ 길이로 자른 줄기 토막을 밭고랑에 눕혀 심으면 마디마다 새싹이 올라온다. 사탕수수 씨앗은 품종 개량에만 쓰일 뿐 상업 재배에는 쓰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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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으로 키우면 어미 그루의 형질이 그대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탕수수 밭에 갑자기 이삭 모양의 꽃이 피어오르면 관련업계는 긴장한다. 개화는 줄기에 쌓인 당분을 꽃대로 돌려쓰게 만들어 당도를 떨어뜨리는 신호여서 달갑지 않다. 한번 심으면 뿌리에서 새순이 올라오는 그루터기(ratoon) 방식으로 3~5년간 반복 수확한다. 줄기를 압착한 즙에서 원당을 회수하는 비율은 사탕수수 무게의 약 10~13%다. 벤 순간부터 당도가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해 24시간 안에 압착해야 손실을 줄일 수 있어서 원당공장은 늘 밭 바로 옆에 자리 잡는다.
사탕무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온대 기후에서 자라는 두해살이 뿌리채소로 줄기가 아니라 뿌리에 당분을 저장한다. 무게 대비 당 함량은 오히려 사탕수수보다 높은 15~18%에 이르지만, 헥타르당 바이오매스가 사탕수수에 못 미쳐 전 세계 설탕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에 그친다. 나머지 80%가 사탕수수 몫이다.
그렇다면 유럽은 왜 사탕무를 택했을까. 1806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카리브해 사탕수수 설탕이 끊기자 프랑스는 이미 실험 단계에 있던 사탕무 재배를 대대적으로 밀어붙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밀ㆍ보리와 돌려짓기가 가능한 사탕무 산업은 유럽 농업 구조에 뿌리를 내렸다. 그 유산이 오늘날 유럽연합을 세계 최대 사탕무 설탕 블록으로 남겼다.
몇 안 되는 산지, 전 세계로 가는 물량
세계 설탕 생산량은 연간 약 1억8000만~1억9000만 톤(t)이다. 이 중 80%가 사탕수수, 20%가 사탕무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설탕은 국제 교역량이 연간 6000만 톤을 웃돌며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거래되는 농산물 중 하나다. 생산은 브라질ㆍ인도 등 소수 국가에 집중돼 있지만 수요는 전 세계에 고르게 퍼져 있어서다. 국제 가격은 뉴욕 ICE 선물거래소의 원당(11번) 계약과 런던의 백설탕(5번) 계약을 기준으로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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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의 가뭄, 인도의 몬순, 그리고 뒤에서 살펴볼 브라질의 설탕-에탄올 스위칭이 겹치면서 커피ㆍ코코아 못지않게 가격 변동성이 큰 시장으로 꼽힌다.
설탕 벨트, 세계 생산국 지도
세계 사탕수수 생산의 압도적 1위는 브라질이다. 전 세계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한다. 상파울루 중심의 센트로-술 지역이 핵심 산지다. 브라질 원당공장은 설탕과 바이오에탄올 사이에서 실시간으로 생산 비중을 조절한다. 국제 유가가 오르면 에탄올로, 설탕값이 좋으면 설탕으로 저울추가 움직이는 이 ‘스위칭’ 구조 때문에 브라질의 선택은 국제 설탕 가격을 좌우하는 최대 변수다.
인도는 세계 2위 생산국(약 20%)이자 세계 최대 소비국이다. 중국은 약 5%로 광시ㆍ윈난 중심의 내수용 생산국이다. 호주는 생산 비중은 크지 않지만(3% 안팎) 퀸즐랜드산의 약 80%를 수출하는 대표적 수출국으로, 아시아 정제업체들이 선호하는 원당 공급처다. 중남미는 브라질 외에도 멕시코ㆍ과테말라ㆍ콜롬비아가 미국 시장 접근이 유리한 CAFTA-DR 체제를 발판 삼아 안정적 수출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버리는 것 없는 정제 공정
사탕수수는 수확 즉시 압착해 즙을 짜내고, 이를 정화·농축·결정화한 뒤 원심분리기로 원당(raw sugar)과 당밀(molasses)을 분리한다. 원당은 정제공장에서 세척ㆍ탈색ㆍ재결정을 거쳐 흰 설탕이 된다. 당밀은 사료ㆍ럼(rum)의 원료이자 MSGㆍ라이신 발효의 탄소원이 된다. 압착 후 남는 섬유질 버개스(bagasse)는 원당공장 자체 열병합발전 연료로 쓰여 브라질의 많은 공장이 전력을 자급하고 남는 전력을 국가 전력망에 판매한다. 설탕 말고도 에너지와 사료, 발효원료까지 함께 뽑아내는 것이 사탕수수 산업의 오랜 특징이다.
브라질 상파울루(Sao Paulo) 피라수눈가(Pirassununga) 지역의 사탕수수 농장의 식재 후 1년이 지나 수확이 임박한 필드의 모습. 지상부만 4∼5년간 잘라낸 후 갈아 엎고 다시 줄기를 잘라 심는 방식으로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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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론으로 잎비료를 뿌려 재배한다. / 사진: 김수철 가치구매연구소 대표
◆사탕수수와 우리 기업, 국내 산업 지도와 미래 전망
한국의 근대 제조업사는 설탕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3년 광복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설탕을 국산화하겠다며 이병철 삼성창업자가 부산 전포동에 세운 제일제당공업이 그해 11월 국내 최초로 흰 설탕 6300㎏을 생산했다. 수입가의 3분의 1 가격에 내놓은 이 설탕은 나오자마자 동났고, 이듬해 생산 설비를 두 배로 늘려야 했다. 제당ㆍ제분ㆍ면방직, 이른바 ‘삼백산업’이 1950년대 한국 경제를 떠받쳤다. 제일제당은 그 첫 장을 연 기업이자 삼성이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출발.이었다. 이후 제일제당은 밀가루ㆍ조미료ㆍ식용유로 사업을 넓히며 오늘날 종합식품기업의 토대를 다졌다.지금 우리가 쓰는 설탕 한 봉지에는 한국 산업화의 초기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제일제당의 뒤를 삼양사와 대한제당이 이었다. 삼양사는 1955년 울산에 제당공장을 지어 이듬해 1월 삼양설탕(현 큐원)을 내놓았고, 대한제당은 1956년 7월 설경동 대한방직 사장이 대동제당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회사다. 한때 7개사가 난립했지만 경쟁에서 살아남은 곳은 이 세 곳뿐이었고, 지금도 국내 제당 시장은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 3사 체제로 이어지고 있다.
단순한 만큼 명확한 부산물
브라질이나 인도의 사탕수수 공장은 줄기째 압착하는 과정에서 버개스ㆍ필터케이크 같은 부산물을 함께 얻는다. 반면 한국의 제당공장은 원료 사탕수수가 아니라 이미 1차 가공을 마친 원당(raw sugar)을 수입해 다시 정제하는 구조라 부산물이 훨씬 단조롭다. 원당을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재결정시키는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결정화되지 않고 남는 액체, 즉 정제당밀이 사실상 유일한 부산물이다. 이 당밀은 배합사료용 첨가제로 쓰이거나 주정(酒精) 업체에 발효 원료로 공급되고, MSGㆍ아미노산 같은 발효 산업에서도 탄소원 중 하나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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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원산지 공장이 다양한 부산물을 얻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정제 공정은 설탕과 당밀 두 가지로 정리되는 단출한 구조다.
한 스푼의 설탕이 닿는 곳들
설탕의 쓰임은 단맛을 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음료ㆍ제과제빵ㆍ소스류 등 식품 가공 전반의 필수 부재료인 것은 물론, 잼ㆍ절임류에서는 방부ㆍ보존 기능을 겸한다. 제약 산업에서는 정제(錠劑)의 코팅이나 시럽제의 기제로, 화장품에서는 보습 성분으로도 쓰인다. 발효 산업에서는 미생물의 탄소원으로 투입돼 아미노산ㆍ유기산 생산의 출발.이 되기도 한다. 식탁 위의 조미료 하나가 식품ㆍ제약ㆍ화학 산업 전반에 걸쳐 쓰이고 있는 것이다.
설탕은 왜 유독 보호받는 품목인가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설탕만큼 보호무역 색채가 짙은 농산물은 드물다. 유럽연합, 미국, 인도는 자국 사탕수수ㆍ사탕무 농가의 소득을 지키기 위해 쿼터, 관세할당, 가격지지 같은 장치를 오랫동안 운용해왔다. 한국은 결이 다르다. 지킬 농가 자체가 없는 대신 원당은 낮은 관세로 들여오고 완제품 설탕 수입에는 높은 관세를 매겨 국내 정제 산업의 생존 기반을 지킨다. 대규모 설비와 물류ㆍ저장 인프라가 필요한 장치산업 특성상 한번 문을 닫은 공장을 되살리려면 막대한 재투자가 필요하다. 정제 기반이 무너지면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국내 생산이 아니라 해외 완제품 수입이 되고, 그 순간 협상력은 원당이 아니라 완제품을 파는 소수 국가 쪽으로 넘어간다. 이 같은 아픈 사례는 이스라엘에서 이미 입증됐다. 이스라엘의 정제업체 수가트(Sugat)는 1957년부터 자국 사탕무를 재배해 정제해왔지만, 수입 설탕이 급증하고 보조금이 줄자 1983년 자체 정제를 포기하고 순수 수입ㆍ유통업체로 전환했다. ‘지킬 농가는 없지만 가공 능력은 지켜내야 할 국가의 인프라’라는 논리가 한국의 설탕 산업을 지탱하고 있다.
대체감미료와 설탕세라는 도전
세계보건기구는 유리당 섭취량을 하루 총열량의 10% 미만, 이상적으로는 5% 미만으로 줄이라고 권고한다. 이 흐름 속에서 각국은 설탕세를 속속 도입했다. 2014년 멕시코가 세계 최초로 설탕음료세를 매겼고 영국은 2018년 ‘소프트드링크산업부담금’을 시행했으며 태국도 2017년부터 당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세율을 높이는 설탕음료세를 운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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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아직 설탕세를 도입하지 않았지만 논의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 압박 속에서 대체감미료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스테비아ㆍ에리스리톨ㆍ나한과 추출물에 이어, 최근에는 알룰로스가 설탕과 가장 가까운 대체재로 주목받는다. 이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는 곳은 삼양사다. 2024년 울산에 국내 최대 규모의 알룰로스 전용 공장을 준공하며 시장 1위 자리를 굳혔다.
한국 제당산업의 미래
한국 제당산업의 다음 10년은 세 갈래 압박 위에 놓여 있다. 저출산과 건강 트렌드로 정체되는 내수 설탕 수요, 알룰로스 같은 대체감미료로의 자기잠식, 그리고 호주ㆍ태국 등 소수 국가에 편중된 원당 조달선의 리스크다. 브라질의 가뭄이나 인도의 수출 규제 한 번에 국제 원당 가격이 요동치는 구조 속에서 조달 다변화와 대체감미료 포트폴리오 확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에 가깝다.
조달 다변화는 이미 한 차례 시도된 적이 있다. 2023년 정부는 제당업계와의 협의를 거쳐 원당 기본관세를 3%에서 0%로 한시 인하했고, 그 덕에 무관세 혜택으로 호주ㆍ태국에 치우쳐 있던 수입선을 관세가 붙던 브라질ㆍ중미로도 선택의 폭이 확장되었다. 관세 구조 자체가 조달 전략을 흔드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여기에 국회에서는 가당음료에 부담금을 매기는 설탕세 논의도 다시 불붙었다. 70년 전 국가 자립의 상징이었던 설탕은 이제 보호와 대체, 경쟁이라는 여러 압력 앞에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다시 증명해야 할 시。에 와 있다.
다음 회는 카놀라다. 노란 꽃밭에서 시작해 식탁의 식용유병과 사료원료, 자동차의 연료탱크까지, 두 얼굴을 가진 기름의 연금술이 펼쳐진다.
글ㆍ그래픽=김수철 가치구매 연구소(kvpi.co.kr) 대표
김수철 가치구매연구소 대표는 곡물ㆍ바이오 카테고리 구매전략 전문가로, 자문ㆍ저술ㆍ강연ㆍ멘토링을 통해 구매를 주제로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론을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다. 대한경제 객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현장에서 축적한 구매 인사이트를 링크드인(LinkedIn) ‘구매단상’과 브런치(Brunch)에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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